오후 늦게까지 무거운 구름이 낮게 깔리더니 하필 이 시점에 비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정말 쏟아지는 비다. 지하철 출구에서 저 마을버스 정류장까지 칠팔십미터쯤 되려나, 평소같으면 앞뒤안보고 내달렸겠지만, 같은 장소 같은 처지의 한 사람 때문에 고민이다. 그리고 마을버스 정류장 대신 근처 편의점으로 달렸다. 삼천원짜리 파란 땡땡이 우산을 집어들고 다시 지하철역으로 왔다. "차타는 곳까지 같이 가요."
첫 번째 이야기
J야 너와 정말 많이 닮은 이 아이와 작은 우산을 함께 쓰며 네 생각을 한다. 우리 짧았던 두어 번의 만남 중 한 번은 우리도 이렇게 작은 우산을 함께 쓰고 걸었었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 베푸는 호의를 마지막으로 기억으로만 남은 너의 존재를 전부 지워버리려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의식이다. 이제는 더 이상 너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으로 어떤 기대도 설레임도 느끼지 않도록, 그렇게 무던히 널 보내는 것이다. "전 내려서 금방이에요, 우산 그냥 가져가세요." 그 때 네 눈빛은 어쩌면 지난 날, 너를 떠날 때 네가 보낸 마지막 눈빛과 너무나 닮았구나.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아무런 끈도 없이 그렇게 네게 안녕을 고한다. 그리고 나는 곧장 버스에서 내렸다. 차창을 사이에 두고 나눈 가벼운 눈인사, 그게 서로를 향한 전부다.
두 번째 이야기
이 년전 너와 헤어지고, 일 년전 네가 다른 누군가와 다정히 걷는 모습을 우연히 본 후에야 너를 완전히 잊겠노라 다짐했었다마는, 이렇게 널 닮은 사람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는걸 보니 그게 아니었나보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어쩌면 내가 일 년전 명동에서 본 사람도 네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너와 똑같지만 네가 아닌 누군가가 바로 그 시간에 거기 있었던 게 아닐까. 너를 단념할 수 있도록 도왔던 그 사건이 거짓이었던 것. 너를 닮은 이 아이가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 건 네 생각의 재발과 내 희망의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이제와서 다시 무엇을 한다면 무척이나 큰 용기가 필요하지만, 이미 난 우산을 집어들고 네게 말을 건네지 않았는가. 우리 같이 가자고.
세 번째 이야기
"이 동네에 사시나 봐요." 외모와 달리 성숙한 목소리다. "네, 어디까지 가세요?" "우성아파트요." "그럼 7번인가요?" "아뇨, 5번이나 101번이요." "아하, 저는 구민회관 근처에요. 전 내려서 금방이에요. 우산 그냥 가져가세요." 고작 그것이 우리가 나눈 대화의 전부다. 처음엔 지인인가 싶어 그를 봤지만 같은 사람이 아니란걸 금방 알아차렸음에도 세련된 외모에 자꾸 눈이 간다. 갑자기 쏟아진 비때문에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이 매력적이다. 우산을 같이 쓰자면서 말을 걸어볼까. 그러나 그 뿐이다. 연락처를 주고 받자니 호의가 저의로 변질된다. 그건 나도 불쾌하다. 인연이라면 또 어떤 식으로든 다시 만나겠지. 시간과 우연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하고 가벼운 눈인사로 안녕.
- FIN -